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웨슬리 (문단 편집) == 개요 == >I look upon all the world as my parish. > >나는 온 세상을 나의 교회라고 생각한다.[* 짧게 "세계는 나의 교회다(The world is my parish)."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는 명언이다. 보통 'parish'를 '교구'로 번역하여, 이 말을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말로 옮기지만 지역 교회의 단위인 교구를 가리키는 영단어는 diocese이지 parish가 아니다. parish는 diocese보다 좁은 의미로, [[개신교]]에서 개별 교회를, [[성공회]]에서는 전도구를 뜻한다. 이 말은 존 웨슬리가 [[영국 국교회]]의 교구에 구애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하겠다는 의미를 넘어 감독이 아닌 목사로서 신자들을 세심히 살피겠다는 뜻으로 한 것이다.] >---- >1739년 6월 23일 남동생 찰스 웨슬리에게 보내는 편지 中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is와 God 사이에 접속사 that이 생략되었다.] >---- >존 웨슬리의 유언 '''존 웨슬리''', [[기독교대한감리회]] 내에서는 때로 '''요한 웨슬레'''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제 강점기 외래어 한글 표기 관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장 칼뱅]]을 '요한 칼빈'이라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웨슬리는 영국인이기 때문에 '존 웨슬리'라고 읽어주는 것이 정확하다.] [[성공회]]에서는 [[사제]]이자 [[복음]] 전도자로서 매년 5월 24일([[성공회|잉글랜드 성공회]]/[[대한성공회]]) 혹은 3월 3일([[성공회|미국성공회]])을 축일[* 성공회에서는 종교개혁 이전인물들의 날은 축일로, 이후 인물들은 정확히는 기념일로 지킨다. 단 종교개혁 이후 인물도 신명(세례명)으로 선택할 수 있다.]로 지킨다. [[루터회]]에서도 3월 2일을 존 웨슬리 축일으로 지정했다. [[감리회]](Methodist Church)의 실질적 창시자이자 웨슬리안 교파[* 사실 웨슬리안 교파라는 용어는 없다. 존 웨슬리가 직접 세우게 된 교단은 감리회이지만 감리회로부터 성결 운동이 발생했고 오순절 운동, [[구세군]] 등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침으로써 웨슬리의 신학과 사상이 영향을 미친 개신교 교파는 [[감리회]], [[성결교회]](성결교회는 미국에서 나사렛 성결교가 처음 생겼고, 일본 동양선교회가 한국으로 선교하면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성결교는 웨슬리의 사상을 따르고 있지만 나사렛 성결교와는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다.), 순복음(한국에서 가장 큰 오순절 교단), [[구세군]] 등 그 수가 많다]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성공회]] [[사제(성직자)|사제]]이자 신학자이며 사회운동가. [[옥스퍼드 대학교]](Oxford University)를 졸업한 후에, 1725년 존 웨슬리는 [[부제(성직자)|부제]]품을 받았으며 1726년에는 옥스퍼드 대학교 링컨 컬리지의 연구교수(Fellow)가 되었다. 1728년에는 [[사제(성직자)|사제]]품을 받았다.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의 교구 사목을 돕다가 옥스퍼드 연구 교수로 되돌아간 1729년부터 남동생 찰스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 등과 함께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성회(Holy Club)를 조직하여 신학 공부와 경건 운동을 시작하였다. [[미국]]에서의 [[선교]]가 실패한 후,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존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Moravians)[* [[루터교회]]의 경건주의 그룹]들을 만나 이들의 신앙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영국에 도착한 뒤로도 모라비안 성직자들과 교류하였다. 1738년 5월 24일에는 회심의 경험을 하고, [[영국]] 전역을 다니며 경건 운동 및 사회 운동을 펼쳤다. 신성회 때부터 경건 생활의 방법으로 확고한 규칙(Method)을 세우고 따르는 것을 택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규칙쟁이(Methodist)'[* 사실 Methodist는 웨슬리주의자 전용 멸칭이 아니라, 당시 [[영국 국교회]]와 [[청교도]] 교회의 침체를 비판하며 등장한 원칙주의에 입각한 개혁가들을 싸잡아 비꼬는 말이었다. [[청교도]] 중 개혁을 주장한 그룹과 [[성공회]] 내부의 칼뱅주의자들이 중심이었다. 웨슬리 파도 그런 부류라고 묶인 것. 초기에는 칼뱅주의자들과 함께했으나 웨슬리가 독자적인 신학관을 표방하여 갈라선 것이다. 웨슬리파의 후신인 [[감리회]]는 잉글랜드 북동부 일부지역, 이외의 나머지는 칼뱅주의 Methodist들이 활동했다. 이 내용은 『옥스퍼드 영국사』에서 대략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국내에서 영국사학회가 번역했는데, '칼빈주의 감리교'라는 괴이한 번역어를 썼다. 그 원인은 당연히 감리회가 교단명으로 쓴 Methodist가 감리회란 의미로 굳어진 것. 칼뱅주의 Methodist들의 활동은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을 통해 간략히 살펴볼 수 있다.]라는 멸칭으로 불렸는데 후에 감리교회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감리회 운동은 단순한 신앙 운동에서 감옥 개선과 노예제 폐지 등과 같은 사회 운동까지 포괄하는 큰 흐름이었다. 존 웨슬리의 신학사상은 칼뱅주의와는 극명하게 대립했다. 존 웨슬리는 특히 칼뱅주의의 이중예정론, 특히 하나님이 임의로 절대다수의 인간들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불에 타도록 내버리신다는 선택유기설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존 웨슬리가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추구한 것도 칼뱅주의와 크게 달랐다.[* 성화는 [[종교개혁]] 시기 칼뱅이 강조한 것이었다. 『기독교 강요』에서는 초판부터 성화에 대한 내용이 고작 한두 줄로 언급된 이중예정에 비하여 더 많은 분량으로 서술되어있다. 성화의 개념은 전통적인 가르침에 가까운 것인데 당시 [[가톨릭]]은 [[미사]]와 [[7성사|성사]]에 참여하여 성화된다고 가르쳤다. 칼뱅은 성화를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의 훈련을 통해 이루어지는 개념으로 본 것이다. 즉, 성례의 의미에 흡수되어 가던 개념을 종교개혁 시기 칼뱅이 순종 훈련의 과정으로 강조한 것이다. 한국 [[정교회]]에서는 "신화"라는 개념으로 가르친다(『정교회 교리서』에서 볼 수 있으며, [[개신교]]의 순종 훈련과 [[가톨릭]]의 성례 참여의 중간 느낌이다. 읽어보면 재미있다. 시간의 개념이 [[야훼|하느님]] 앞에서는 의미가 없으며, 모든 시간(과거에서 미래까지)이 하느님 앞에서는 현재와 같이 펼쳐져 있고 교회의 신자들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서술도 있다.). 다만 '완전'이란 개념은 웨슬리의 독자적인 것이다. 어디까지 성화되어야 완전한지는 웨슬리조차도 기준을 제시하지 못했지만. 이외에도 칼뱅이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성찬을 할 것을 주장한 내용도 초판부터 수록했다.] 존 웨슬리는 성찬을 지속적으로 베풀고 행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내면뿐만 아니라 외적인 영역에까지 드러나야 한다고 보았다. 또 존 웨슬리는 그리스도인 개인이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존 웨슬리는 평생 [[성공회]] 사제로 남았고, [[감리회]] 운동은 단지 성공회의 교리를 충실히 따르고 타락하고 경직된 성공회를 개혁하는 경건 운동으로만 생각하였다. 하지만 성공회 [[주교]]들과의 마찰과 대다수 성공회 성직자들의 비협조로 사제 직무자격이 정지되어 결국 독립 교단으로 분리되어 감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로 통한다. 존 웨슬리는 교회사에 큰 족적을 남겼고, 18세기 [[산업혁명]]으로 각종 사회 문제가 산적했던 영국을 변화시킨 위인으로 평가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